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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9월에 채용공고가 떴는데 최종면접을 보던 날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100여일간의 전형 과정 끝에 중앙일보ㆍJTBC 기자가 됐습니다. 회사에서 보내준 합격 축하 꽃바구니를 받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전형 과정에 대해서는 다른 동기들이 상세히 잘 썼을테니 저는 그 중 2주간의 현장실습평가 과정에서 느낀점을 써 보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중앙일보ㆍJTBC 전형에는 2주간의 현장실습평가가 있습니다. 중앙일보와 JTBC에서 각각 1주 씩 총 2주 동안 현장에서 선배들과 함께 일하며 매 순간을 평가받는 과정입니다. 대부분의 동기들이 입사 전 언론사 인턴을 했던 것과 달리 저는 요즘은 하나씩 다 있다는 그 흔한(?) 인턴 경력 조차 없습니다. 실무평가 때 썼던 1300자 정도의 기사가 제가 처음으로 쓴 사회부 기사였을 정도로 모든게 낯설었습니다. ‘메모를 올린다’는게 무슨말인지도 모를 정도였으니까요. 이 상태로 베테랑 선배들이 있는 현장에 가게됐습니다. 첫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 투성이였습니다. 퇴근 지시를 받았는데 도저히 몸을 일으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진이 빠져서 한 시간이나 회사 로비에 앉아있었습니다. 겨우 힘을 내 몸을 일으켰던건 “적어도 오늘보다는 잘하자. 매일매일 조금씩만 더 잘하면 된다”고 스스로 되뇌이며 추스른 후였습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매일 활동일지를 써서 제출했는데, ‘활동일지는 향후 최종면접에 반영될 예정이니 신중하게 작성해주세요’라는 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활동 내용과 활동 소감을 적었는데 사실 말이 활동일지지 거의 반성문이었습니다. 그래도 “매일 조금씩 더 잘하자”는 다짐으로 2주간 활동일지를 쓰다보니 마지막 즈음엔 꽤 알찬 반성문이 되어있었습니다. 여전히 반성문이었지만요.
최종면접 때 “이번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거냐”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사실 누군가를 특정해서 1:1로 한 질문은 아니었는데 하필 제가 그 분 앞에 앉아있다가 눈이 마주쳐 어쩔 수 없이 대답하게 됐습니다. “2주 현장실습평가를 하면서 제일 많이 생각했던 말이 있습니다. ‘과정에 진실하라’는 것인데요. 대학 수업 때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계산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매 순간 모든 것을 쏟아부으면서 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매 순간 그렇게 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잊고 살았던 저 말이 갑자기 떠오른건, 지난 2주간 이 곳에서 현장실습평가를 하면서 본 선배들의 모습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듣고 흘려버린 문장이었는데, 매일을 그렇게 채워가는 선배들을 봤습니다. 저 역시 선배들을 따라 지난 2주만큼은 모든 순간을 충실히 보냈습니다. 아프게 깨지며 혹독한 반성문을 쓰기도 했지만 그 덕에 2주전과 지금은 분명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떨어진다면 앞으로 1년을 또 이렇게 충실히 살아 내년 이맘때 쯤 다시 오겠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전형 위원은 곧바로 “외워온 답이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셨지만 저는 기회가 있을 때 꼭 한번쯤은 회사에 그리고 스스로에게 하고싶었던 말인지라 속이 후련했습니다.
며칠 뒤 합격 소식을 들었고 추운 겨울날 수습을 시작해 이제 막 면수습을 했습니다. 수습을 뗀 이후 오히려 하루하루가 더 버거운 요즘, 전형 과정에서의 ‘반성문’을 가끔 펼쳐보곤 합니다. 아직도 잘하는 것 보다 모자란게 많지만 그래도 ‘과정에 진실하라’는 다짐은 지키고있는 것 같아 조금은 뿌듯합니다.
‘합격 수기’라고 이름 붙이기엔 모자란 내용입니다. 그저 불과 몇달 전까지 이 곳을 들락거리며 선배들의 글을 외우도록 읽었던 사람이 전하는 소감입니다. 소박한 저의 이야기가 이제 신발끈을 조여 메고 100여일 정도 길을 떠날 채비를 하는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됐으면 합니다. 두렵고 막막하지만 묘하게 설레는 느낌. 그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지금 누구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글을 읽고 있을 여러분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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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중앙일보 사회팀 기자 김정연입니다.
작년 전형은 서류 - 필기 - 1박2일 합숙(+사전취재) - 2주 현장평가 - 최종면접 5단계였습니다. 총 3개월이 넘게 걸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연말이었습니다.
‘언시는 멘탈싸움’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수험생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작년의 준비과정 중, 이게 조금이나마 저에게 도움이 됐던 부분인 것 같습니다. 수험생활 초반엔 결과물이 없는 데에 점점 지쳤지만, 결과물이 없어도 쌓이는 건 분명히 있다는 믿음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필기 공부도 당장 성과가 보이는 건 아니지만, 하루하루 모래를 쌓아서 모래성을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면접도 욕심을 버리고 ‘떨지 않고 긴장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오기만 해도 성공이다’라는 생각으로 임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내세우고 싶은 것’ 말고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뭘까 고민했습니다. ’얘를 뽑으면 어떤 장점이 있을까‘를 고민할 심사위원들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자기소개서 문항이었던 ’사회부 기사체로 나를 소개하기‘와 ’나를 키운 8할‘에도, 면접관들이 ★가장 궁금해할만한 부분★에 대한 답을 위주로 썼습니다. 면접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 큰 결과를 기대했다가 떨어지면 타격이 크니, 늘 ‘이번 단계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 라고 생각하고 그 단계 발표일만 보면서 지냈습니다. ‘이 전형을 치르고 있다니 작년의 내가 보기엔 꿈만 같은 일이네! 고생했다, 열심히했다’라고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버텼습니다. 원하는 곳에 한 발 한 발 가까워지는 기쁨이 차올라서, 밝은 기운이 겉으로도 드러났으면 했습니다. 밝아질 수록 개인이 가진 색깔, 개성이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비슷비슷한 지원자들 사이에서, ‘나만의 색’이 뚜렷한 건 분명한 장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입사해서 본 중앙‧JTBC 사람들도,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선배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던 언시생 때의 저를 떠올리며 적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준비할까’ ‘이게 최선인가’ 고민이 많았을 때 저도 다른 사람의 준비 과정을 읽으면서 참고한 만큼, 간단한 참고로라도 유의미했으면 합니다.
흘러가는 하루하루 말고, 쌓아가는 하루하루 만드시기 바랍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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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재밌는 수습기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보고 있을 분들은 제가 어떤 재미를 느꼈는지 보다는 어떻게 합격했는지가 더 궁금하겠지요. 작년의 저처럼요.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작년 전형과정을 적어봤습니다.
필기시험
저는 글을 못 씁니다. 되도 않는 글 솜씨를 뽐내려다 필기시험에서 미끄러진 적이 많습니다. 하도 많이 떨어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떨어뜨리려면 떨어뜨려라’하는 심정으로 솔직한 생각을 가감 없이 썼습니다. 그 때부터 필기시험에 붙기 시작했습니다. 중앙일보·JTBC 논작 시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논제는 소설(영화) 남한산성과 2017년 한국사회를 비교하는 거였습니다. 저는 척화파와 주화파를 남존여비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기존의 사상을 깨려는 페미니스트에 비유해 글을 썼습니다. 너무 막 질렀나 싶기도 했지만 다행히 이 회사는 저를 내치지 않았습니다.
현장평가
현장평가 키워드는 ‘겨울’이었습니다. 밖으로 나가니 한 환경미화원이 반팔 미화원복을 입고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동복이 아닌 하복을 입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내피가 두툼한 동복은 너무 무거워 활동량이 많은 환경미화원에겐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환경미화원에게 배려가 부족한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경미화원 휴게소에서 만난 다른 환경미화원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덕분에 ‘겨울에도 반팔입는 환경미화원들’ 이라는 기사를 쓸 수 있었습니다.
합숙면접
카메라 테스트, 토론면접, 현장평가 때 썼던 기사를 바탕으로 한 인성면접을 봤습니다. 토론면접 주제는 ‘대체군복무제 찬반’이었습니다. 이 때 함께 들어간 6명 모두 찬성이라고 손을 들어 면접 전형 위원분들과 토론을 했던 끔찍한 기억이 납니다. 논리적인 척을 하기 보단 그냥 솔직한 생각을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이어진 면접에선 선배들의 지적(또는 공격)에 노발대발 반박을 하려고 하기 보단 그냥 저의 부족함을 인정했습니다.
2주평가
인턴기자도 아닌 예비기자라는 애매한 신분으로 난생 처음 서울중앙지검과 국회에 갔습니다. 그저 선배의 지시에 따라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최종면접
한 임원분이 저에게 “그동안 많이 떨어졌는데 이번엔 붙을 것 같냐”고 물었습니다. 당황하긴 했지만 붙을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스스로 이정도면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엔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습니다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나왔습니다. 감사하게도 며칠 뒤 최종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제가 왜 합격했는지 저 역시 잘 모르겠지만, 굳이 하나를 꼽자면 솔직함이 아니었나싶습니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분들도 솔직함을 무기로 당당하게 합격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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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는 국회에 있었다. 한 언론사 정치부 인턴 4개월 차. 이번엔 붙을 줄만 알았던 그 언론사 공채 면접에서 탈락 통보를 받은 날, 국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펑펑 울었다. 그러고도 2개월이나 더 그 언론사의 이름이 적힌 노트북을 들고 국회에서 일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번에 그 회사 공채 안 봤냐”고 물었다.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언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반년의 인턴 기간이 끝나고 한 달 간은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스터디도 쉬고, 사람도 안 만났다. 중앙일보‧JTBC 채용공고가 뜬 게 그 때. 길어진 시험 준비로폴더에 가득한 자기소개서들을 보면서, 솔직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잘 아는 걸, 솔직하게 보여주자. 수차례 떨어진 시험을 돌이켜보면, 난 늘 ‘있는 척’을 해댔다. 제일 멋져 보이는 거, 튀는 걸 하려고 애쓰다보니 정작 내가 잘 하고 잘 아는 건 보여주지 못했다. 중앙일보‧JTBC 자소서를 쓸 땐 아예 오래 전부터 친했던 스터디원들과 각자의 이미지에 대해 끝장토론을 벌였다. ‘나를 키운 8할’을 묻는 항목에 ‘최저임금’이라는 답도 그 토론에서 나왔다. 7년 동안 해온 아르바이트 경험을 수기처럼 솔직하게 썼다. ‘내가 이렇게 잘났다!’는 얘기보다, 내가 얼마나 ‘쭈구리’로 살아왔는지. 그런데 거기서 뭘 느꼈는지.
합숙면접 전날에는 취재시험을 봤다. 제시어는 ‘겨울’. 이번엔 6년 간 거쳐 온 아련한 셋방살이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수도관이 동파돼 밤새 수도관에 끓는 물을 붓고, 외풍이 심해 스터디하면서 읽은 신문지를 창문에 붙이고, 가스비 아낀다고 집에서도 패딩을 입고…. 온갖 구질구질한 사정이 별반 다를 게 없었던 친구 집부터, 부동산, 대학가 고시원을 돌아다녔다. 잘 아는 얘기라 구체적으로 묻고 들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취재시험에서 제출한 기사가 부끄럽지 않았다. 적어도 꾸며내거나 억지로 갖다 붙인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최종면접날, 한 면접관이 내게 물었다. “성지원씨는 지금까지 시험 본 언론사가 몇 갠가.” 지상파 방송, 종합일간지, 경제지까지. 술술 경쟁사 이름을 읊어대는 내가 어이없었던지 면접관이 다시 물었다. “붙었으면 갔겠네?” 짧은 순간, 오랜만에 머릿속으로 온갖 ‘있는 척’이 스쳐지나갔다. 아니라고 말할까. 마음속에는 중앙‧JTBC만 있었다고 할까. 붙었어도 여기 다시 지원했을 거라고 할까. 결국 정공법을 택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붙었으면 회사를 다니고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떨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앙‧JTBC에 지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면접을 보고 이 대답을 제일 후회했다. 너무 솔직했던 거 아닐까. 잠 못 드는 크리스마스 다음날 오후. 합격 문자를 받았다.
그래서 올해 여름, 나는 또 국회에 있다. 이번엔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라는 명함을 들고. 악몽같던 수습 기간을 거쳐 부서 발령 한 달 째, 내가 해본 거, 잘 아는 것만으론 도저히 수습 불가능한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다. 모르는 사람을 찾아가 무작정 말을 붙이는 건 물론, 알지도 못하는 사건을 취재하느라 머리를 싸매는 일들이 부지기수. 매일 멍청한 눈빛으로 너덜너덜 집에 오는 퇴근길을 떠올리면, 지금껏 늘어놓은 내 입사 준비 방법이 정답이라는 말은 도저히 할 염치가 없다. 그래도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거짓말이나 꾸며냄이 절대 통할 수 없는 전형과정이었다는 것. 지금 이 페이지를 보고 있는 언시생 여러분에게(감히 후배라고 부르기엔 난 선배가 될 자격이 도저히 없다) 결국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중앙일보‧JTBC에서는 조금 더 솔직해져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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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심심할 때마다 중앙일보/JTBC 채용 홈페이지에 들어가 ‘선배들의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서류 제출을 앞두고도 꺼내 읽었고 최종 면접장에 들어가기 직전에도 꺼내 읽었습니다. 읽을 때마다 누군가로부터 응원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중앙일보/JTBC 채용 전형을 밟아나가실 후배 여러분도 선배들의 이야기를 통해 힘을 얻어가시기 바랍니다.
제가 작년에 거친 전형은 서류-필기-현장취재-합숙(실무면접, 토론, 카메라테스트)-2주 평가-최종면접 순이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칠 때마다 저는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 말자’는 다짐을 거듭 했습니다. 저는 제가 특별히 어려움을 겪었던 순간마다 이 다짐을 되새긴 덕분에 중간에 탈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들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언론사 채용 전형의 핵심은 필기, 그 중에서도 논작문일 겁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작년 중앙일보/JTBC 논술 문항은 병자호란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저는 논제를 받자마자 눈 앞이 하얘졌습니다. 제가 타고난 역(사)알못이었던 데다 당시 한창 유행이었던 영화 남한산성(병자호란 배경)조차 안 봤던 탓입니다. 영화 남한산성은 하필이면 필기시험 끝나고 볼 계획이었습니다. 남들이 시험지에 병자호란에 대한 해박한 지식, 영화에서 본 재밌는 썰 등을 풀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니 혼자 사막 한가운데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설프게 아는 척하기보단 아는 것만 쓰기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조선을 오늘날 한국에, 청을 오늘날 중국에 빗댔습니다. 명과의 의리를 미국과의 의리로 치환하고 나니 아는 게 한결 많이 생겼습니다. 논술 소재였던 병자호란은 완전히 패싱했습니다. 제가 아는 내용으로만 써내려가니 그래도 글 한 편을 완결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제가 어떤 내용의 글을 썼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다만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 않은 덕분에 필기시험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합숙에 올라갔습니다. 합숙에선 다대다 토론 전형을 거쳐야 했습니다. 토론 주제는 여러 개 중 랜덤이었는데 ‘군 가산점 폐지, 적폐청산, 최저임금 인상’ 등 제가 미리 준비해간 주제는 거기 없었습니다. ‘최저임금 인상 이후 정부가 민간 기업에 인건비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논하라’는 들어본 적 없는 주제가 나왔습니다. 또다시 눈 앞이 하얘졌습니다.
정부 정책의 디테일을 아는 척하기보단 원칙적인 얘기를 하겠노라 마음먹었습니다. 또 하나, 토론이 시작되면 먼저 나서지 않겠다고도 다짐했습니다. 토론에서 오히려 말을 아꼈습니다. 남들 얘기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여기에 ‘한계소비성향’같은 원칙적인 이론을 살짝 덧대 저만의 논리를 짧게 짧게 이야기했습니다. 토론 성적은 높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쓸데없는 말로 마이너스 요인을 만들지도 않은 덕에 다음 전형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막 수습 꼬리표를 뗐습니다. 기자가 되고 보니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 말자’는 다짐이 더 자주 가슴에 와닿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만의 원칙을 가지고 앞에 놓인 고비를 하나하나 넘겨내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저도 제 위치에서 하루 하루 고비를 넘겨가며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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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홈페이지에 올라갈 ‘선배들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메일이 왔습니다. 얼마 전 겨우 수습 딱지를 떼고 현장에서 요령 없이 몸으로 부딪히는 것밖에 모르는 제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지 한참 고민했습니다. 아직 기자를 하는 법을 모릅니다. 그래도 기자가 되는 법은 조금이나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제가 정답은 아닙니다. ‘저 사람은 저런 전략으로 시험을 치렀구나’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기소개서, 논술, 작문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수백명의 지원자가 쓴 글을 전형위원들이 읽고 평가한다는 겁니다. 주제를 잡기 전에 읽는 사람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다른 지원자들이 쓴 수백편의 이야기와 겹치지 않도록 고민했습니다. 자기소개서에 녹인 경험이 나만의 것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게 디테일을 살렸습니다. 예를 들어, 소년원에서 검정고시를 가르쳤던 경험을 쓰면서 학생들의 양말에 집중했습니다. 키티, 도라에몽 캐릭터 양말, 땡땡이 양말 등을 묘사해 나만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논술과 작문도 다른 지원자들과 주제가 겹치지 않도록 오래 고민했습니다.
역량평가는 막막했습니다. 기사를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었고 당연히 취재 경험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전형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어 힘들었습니다. 키워드를 주고 하루 동안 취재해 기사를 써서 보내는 시험입니다. 지난해 나온 키워드는 겨울이었습니다. 60여명이 역량평가를 치렀는데 60개의 각기 다른 기사가 나오진 않았다고 하더군요. 뉴스, 기존에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기사를 발굴하면 분명 좋은 평가를 받을 겁니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저는 그러지 못 했습니다.
새롭지 않은 얘기라도 가치와 현장을 담으려 했습니다. 지하철 적자로 경로무임승차 폐지 논의가 있던 때였습니다. 폐지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지하철 무임승차가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 물건을 배송하는 실버택배를 취재했습니다. 전화로 섭외가 안 돼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실버택배 일을 하고 있는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만났습니다. 배송하는 걸 계속 쫓아다니며 10명 가까운 실버택배 종사자들에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서울교통공사에 전화하고 자료를 찾아 기사에 넣었고 실버택배 어르신들의 목소리로 기사를 완성했습니다.
쓰고 나니 막연하고 추상적인 얘기처럼 느껴지네요. 마지막으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중앙그룹 합숙평가 때 전형위원장이 한 말입니다. “강물은 곧게 흐를 수도, 굽이쳐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건, 과정과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강물은 언젠가 바다에서 만납니다.” 언젠가 여러분을 현장에서 만나 뵙게 될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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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 허정원님은 중앙일보ㆍJTBC 신입사원 공개채용에 최종합격하셨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상상. 꿈. 그런데 정말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크리스마스가 하루 지난 2018년 12월 26일, 30살의 끝자락에서 최종합격이라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지금이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누군가 볼 수 없다거나,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상상을 하면 그게 뭐든 불안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지요. 저에게는 '공개채용' 이 바로 그랬습니다. 누구도 내어 놓고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때가 마지막 기회임은 알고 있었습니다.
능력이 뛰어나거나 제 이미지가 좋아서 합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종합격을 한다면' 그 이후에 머릿 속에 떠오르는 '상상'이 힘든 준비 과정을 버티게 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력도 자신감도 부족했지만, 조금은 대책없는 상상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갔기에 지금 중앙일보ㆍJTBC 선배ㆍ동료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합격 후 가족들과 가졌던 소박한 저녁 식사 자리가 아직 생생합니다.
◇ 상상이 가능한 영역으로
저는 상상이 가능한 영역으로 '공개채용'을 끌어와 보았습니다.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저도 늘 친구ㆍ직장동료ㆍ이웃들을 보면서 어떤 이미지를 갖거나 판단하곤 했습니다. "결국 채용도 사람이 사람에 대해 이미지를 갖고 판단하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에 계시는 선배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홈페이지도 많이 들어가보고, 중앙의 뉴스와 함께 '중앙에 대한' 뉴스도 많이 봤습니다.
'변화ㆍ디지털'라는 하나의 키워드를 뽑아낼 수 있었습니다. 다른 매체들에 비해 회사가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하려한다는 이미지를 받았고, 저는 기존의 '언론'이라는 이미지에 저를 끼워맞추기 보다는 '회사에 자꾸 새로운 걸 제안해봐야겠다' 라는 생각을 갖고 채용에 임했습니다.
◇ 시험에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녹여내기
애초에 이런 목표를 가지고 들어가다보니, 여기에 맞춰서 글도 면접도 준비하게 됐습니다. '채용'이라는 진중한 단어와 '기발한 상상'이라는 톡톡 튀는 단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전자는 회사의 '지금'에 내가 어울리는 과정이었고 후자는 회사의 '미래'에 내가 어울리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울림에는 결국 저의 경험과 개성이 들어가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여기에 집중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마다 개성과 능력은 다 다르고, 결국 그 차이로 인해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과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랑 다른 내 특징과 능력은 뭘까?' 제가 한 경험과 시간을 믿고 집중했던 것이, 합격의 이유가 되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회사는 그 다양성을 존중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 오늘도 마감 시간이 닥쳐온다
수습을 막 끝낸 지금도 그 욕심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타사와 다른 뉴스를 쓰려면 어떻게 써야할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시간은 아무리 있어도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그때는 또 상상을 해 봅니다. 출근하면서 지하철에서, 일하다가 사무실에서 뉴스를 보거나 혹은 뉴스를 보는 척 하는 사람들을. 내 기사를 누군가 소리 내 읽는다면 자연스러울까? 매일 이러한 상상에서 답을 구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뭔가를 이뤄낸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늘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회사의 모든 선배ㆍ동료들과 좋은 뉴스란 어떤 것인지 상상하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 이 상상에 동참해 주실 후배님들, 어디에 계신가요?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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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날이 뜨거워지던 5월의 마지막 주, 광화문광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을 미룰 수 있다고 말해 꽤 시끄러웠던 떄입니다. 그날 저는 트럼프 규탄 기자회견 일정을 챙기라는 지시를 받고 광화문 광장을 찾았습니다. 사안이 사안이었던지라 여러 단체에서 광장을 찾아 릴레이 기자회견을 벌였습니다. 저도 다른 기자들과 볕 아래 앉아 발언자들의 힘준 말들을 노트북에 받아적었습니다.
문제는 마지막 기자회견이 진행되던 중에 터졌습니다. 입사 뒤부터 함께했던 2011년생 노트북의 배터리가 3시간여 연속 취재를 버티지 못하고 바닥을 드러냈던 것이죠. 옆 자리 타사 수습기자에게 통사정해 내용을 전달받기로 했습니다만,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노트북에 담겨 있던 그 이전 기자회견들의 내용을 보고할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어디라도 노트북을 충전할 수 있는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몇 분쯤 걸었을까,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디냐, 고 묻는 말에 카페로 이동 중이라는 답을 하자, 몇 초 간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저는 그 정적의 의미를 바로 깨달았는데, 그건 제가 선배의 지시도 없이 취재 현장을 멋대로 벗어났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날 참 다양하게 혼이 났습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하지만 멀지 않은 과거의 일들처럼 다양한 된소리가 들어가는 욕을 먹지는 않았지만, 저와 기자라는 업의 어울림에 의문을 표하는, 자존감에 악영향을 끼치는 여러 말들을 들었습니다. 요는 제가 지시 없이 현장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제 상황에 대한 보고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기자회견 내용 정리가 덜 됐는데 노트북 배터리가 떨어졌다. 정리가 늦어 죄송하다. 충전 가능한 곳으로 이동해 바로 보고드리겠다'고 말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손이 왜 이렇게 느리냐는 지적은 받았을지언정, 보고와 지시 이행이라는 기자의 기본을 모르는 수습은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 잠깐 혼날 것이 두려워 더 큰 화를 자초했던 셈입니다.
수습 생활을 하던 여섯 달 동안 그 날 말고도 참 다양한 실수를 알차게도 쏟아냈습니다. 그 중엔 여기에 적기 부끄러운 일들도 많습니다. 아마 수습기자로 들어올 여러분이 하게 될 실수 중 거의 대부분은 제가 했던 실수일 겁니다.
실수의 선배로서,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실수는 혼자 해결하려 할수록 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내 실수를 선배들이 알면 지적하고 수정해줄 수 있지만, 숨긴 실수는 결국 더 악화돼 곪아터지더군요. 그러니까 수습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수습할 수 있는 사고를 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다 보니 채용 홈페이지를 찾은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입사 관련 정보라고는 한 줄도 없는 영양가 제로의 글이 됐습니다. 다만 비록 조금 우울한 내용이더라도, 여러분이 입사 후 수습기자가 된 여러분을 구체적으로 그려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구체적으로 꿈꿀수록 더 잘 이루어진다고 하니까요. 선배의 한탄, 읽어 주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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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의 이야기'에 오효정의 이야기가 실리는 걸 목표로 공부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익스플로러 주소창에 r을 치자마자 ‘recruit.joongang..’가 자동완성 되네요. 수험생 시절 이 홈페이지를 얼마나 들락거렸던가, 그 간절함을 다시 떠올립니다.
매일매일 열심히 살아도 '내가 될까'엔 확신이 서지 않는 불안의 일상을 너무도 잘 알기에, 오히려 무슨 얘기를 전해드려야 할까 고민스럽습니다. 필기시험 잘 보는 법? 면접 잘 보는 법? 이런 저런 것들을 생각하다 관둡니다. 기자시험을 언론'고시'라고 칭하는 건 공부 자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을 찾는 게 어려워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 방법도 완벽히 찾지 못했던 저로서는, 차라리 ‘우리의 수험생활’이 기자가 되기에 꼭 필요한 절차가 맞는지, 그 의문만이라도 해결해드리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언시생 때가 가장 똑똑했던 것 같아." 나즈막히 던진 말에 동기들이 웃습니다. 기자시험을 준비하는 건 정도가 없어 어렵고 막막하지만, 읽고 쓰기, 그리고 생각하기라면 준비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광범위한 읽을거리들을 모아 기계처럼 읽어 넘기고 ‘써재끼던’ 날들이 기자가 된 뒤 마주한 현장에서 갑자기 툭툭 튀어나올 때가 있더군요. ‘대한항공 갑질 논란’을 취재할 땐 ‘전언의 전언은 보도할 수 없다’는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르고, 미세먼지 소식을 연일 전할 땐 재해와 재난은 어떻게 보도해야 하는지 분석한 논문을 생각하게 되고요. 막막하게만 보이는 공부들은 분명 어디로 날아가지 않고 조용히 등장할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책상에 앉은 공부에 그치지 말라는 말씀은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도서관에만 앉아 뉴미디어는 어떻고, 저널리즘 윤리는 어떻고, 외우면서 뿌듯해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논술에도 요령이 생겨, 어떤 이슈를 만나도 매끄럽게 쓸 수 있겠단 자신이 생긴 적도 있었습니다. 아는 건 많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떨어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 답안지엔 아무런 현장이, 생기가 없더군요. 디지털미디어시대의 우리 회사는 어떤 전략을 세워야겠냐는 질문에 뉴미디어 이론을 줄줄 외는 수험생보단, 직접 콘텐트를 만들어 여기저기 올려본 지원자가 더 매력적이겠더라고요. 첨예한 갈등이 있는 이슈를 어떻게 풀어가야겠느냐는 질문에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을 줄줄 외기보다, 수많은 집회와 각종 시민단체를 다녀본 경험을 얘기하는 게 더 멋지게 보이겠다 싶었습니다. 지긋지긋한 수험생활, 가벼운 엉덩이로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면 무언가 낭만이라는 게 가끔 느껴지기도 하고요.
“잠깐 제 눈을 바라봐주시겠습니까” 싱긋 웃으며 1분 자기소개를 시작했던 최종면접. 그 날 면접장을 나오기 전 꼭 하고 싶었던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했던 말들, 여기까지 온 마음가짐, 잊지 않고 지키면서 살아갈 겁니다. 그 마음먹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조금 오글거린단 생각에 용기는 내지 못했지만) 어쩌면 이 문장은 제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걸요. 지금 예비언론인으로서 갖고 계신 패기와 다짐, 고민을 붙잡고 살아가신다면, 어떤 보답이든 선물처럼 깜짝 등장할 겁니다. 저는 그 선물이 여러분들께 시간을 조금 당겨 오길, 열심히 일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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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으로 배어 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중용’ 23장입니다. 영화 <역린>에서 정조의 명대사이기도 합니다. 언시생 시절 노트 표지에 적어둔 말이자 휴대폰 배경화면이었습니다. 거창한 뜻에선 아니고, 불안한 마음에서였습니다. 내가 하는 공부가, 오늘 써본 논술 한 편이, 아침 지하철에서 외운 시사상식이 너무 '작은 일' 같은데 과연 기자가 될 수 있을까 막막했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세요, 2018년 1월 입사한 이예원입니다. 작년의 저처럼 막막한 마음에 이 글을 보고 계신 분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답답하기도 할 겁니다. 다른 사람은 대체 어떻게 공부하는지 궁금했던 제 모습이 떠올라 제 준비 과정을 짧게나마 적어보겠습니다.
자기소개서는 가장 중요한 만큼 제일 어려웠습니다. 작년 자소서 1번은 사회부 기자의 기사체로 자신을 소개하라는 문항이었습니다. 몇 번을 다시 썼는지 모릅니다. 자꾸 제가 '있어 보이는 척'을 하더라고요. 쓸데없는 포장지를 벗겨내고 나서야 내가 누군지 보였습니다. 서류에서 오타는 내지 않으려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첫인상인 만큼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잔 마음이었습니다.
필기전형에선 모범답안에 갇히지 않으려 했습니다. 소위 '잘 쓴 글'을 보더라도 그 틀을 따르기보단 나라면 어떻게 새롭게 쓸지 고민했습니다. 작년 논제는 병자호란 관련 인물 한 명이 현재로 온다고 가정하고 지금의 한국 사회를 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전 척화파 김상헌이 국회에서 특별연설을 한다는 상황으로 썼습니다. 첫 문장은 "내가 한참 선배니 일단 반말로 하겠네."였습니다. 뒤따르는 본문에선 그간 습작했던 글감을 엮어 써내려갔습니다. 위트 있게 쓰려 했는데, 분명 부족한 점도 많았을 겁니다. 다만 너무 틀에 갇히진 말란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면접은 어떤 질문이 나올지 누구도 모릅니다. 처음엔 예상 질문을 최대한 많이 뽑아 답변을 다 준비해갈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양으로 승부를 보려니 대답이 다 매력이 없어지더군요. 결국 기본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생각했습니다. 특히 ‘왜 기자를 하고 싶고, 왜 여기여야 하는지’ 스스로 답을 찾아 나갔습니다. 실제 면접에선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 3개를 받았는데, 그간의 시간 덕에 생각보다 당황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중용 23장은 아직도 제 휴대폰 배경화면입니다. 기자가 되니 더 자주 막막하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도 계속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며 후배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응원합니다.